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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속 스캔들>


때로는 어떠한 스토리라인보다 배우의 몸이 더 많은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마치 <해리포터> 시리즈를 찍는 10년간 천천히 자라난 다니엘과 엠마의 몸이, 시리즈 마지막에서의 왈츠에 형언키 어려운 시간의 결을 불어넣었던 것 처럼. 영화는 언제나 카메라에 의해 찍힐 대상에 의해서만 자신을 설명할 수 있다. 배우의 몸이나 세트장과 같은 대상들은 영화 이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다. 이들은 시나리오를 가지고 창조한 세계가 아니라 오히려 이들에 의해 시나리오가 생겨난다는 점에서, 우리는 이들을 선존재하는 영화의 타자 혹은 영화라는 존재의 영도(零度)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이러한 전제를 겸손하게 수긍하며 외부 대상의 영향력을 텍스트 내부로 끌어들여 그 힘에 대한 길항을 통해 서사를 조직해갈 때, 그 순간 복제시대의 예술품으로서의 영화는 자신의 윤리와 미학을 얻게 되는 것은 아닐까? 류승범의 몸을 입지 않은 <부당거래>의 검사를 상상하기 어려운 것 처럼, 통영의 구불구불하고 비좁은 도심에서 벌어지지 않는 <하하하>의 여행을 상상하기 어려운 것 처럼.
(이러한 영화의 특성은 TV에 나오는 인물이나 배경을 그대로 진짜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어린애나 할머니의 태도에서도 보이는 건 아닐까. 아직 카메라에 찍힌 대상이 자본이나 테크놀로지를 통해 쉽게 조작될 수 있는 시대임을 자명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 친구의 할머니는 설날특선 <아바타>를 보시다 "저 사람은 외국인이냐? 난 저런 건 본 적이 없다..."라 물으시며 심란한 얼굴이셨다고.)

위와 같은 의미에서 <과속 스캔들>이 내게 줬던 감동의 대부분은 배우 차태현의 몸에서 비롯했다. 고등학교 야간자율학습 시간, 무조건 탈출하고 싶었지만 딱히 갈 곳을 모를 때는 멀티플렉스 영화관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나는 휘황한 포스터들 가운데 벙벙해하다 게 중 친숙한 것들을 골라내곤 했는데 그 때 차태현의 영화를 자주 봤다. <연애소설>, <엽기적인 그녀>, <첫사랑 사수 궐기대회>와 같이 한 줄기로 묶어낼 수 있는 소년 로맨스물에서 그는 소심했지만 제 몫의 인생을 소녀에게 헌납할 줄 알았다. 누구나 수긍할 법한 첫사랑의 감정을 그는 연기했고, 그것도 아주 보편적이고 쉬운 표현방식으로 해냈다. 사람들은 그에게서 신묘한 표현력을 가진 천재를 보진 않았지만 대신 자신의 거울을 보듯 일상인의 표정을 스크린에 비춰보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그렇게 철없던 소년은 관객과 함께 나이를 먹어 이제는 아빠를 연기한다. 예전의 까불락거림과 친밀한 제스쳐는 그대로지만 정직하게 나이 든 몸은 예전과 다른 감흥을 주었다. 그건 열광보다는 무던함으로 그의 영화를 보러가던 나의 고딩시절에 대한 추억일 수도 있고, 혹은 초등학교 첫사랑과  결혼을 맞이했다던 영화같은 그의 일상에도 불구하고 장삼이사의 일상사 같은 그의 영화 목록이 벌이는 기이한 공명일 수도 있고, 혹은 소년도 늙는다는 진리? 혹은 소년처럼 늙을 수 있다는 감동일 수도 있다. 마지막 장면, 기타를 매고 딸과 손주를 흐뭇하게 바라보다 문득 관객석에 앉은 사랑하는 여인에게 능글맞은 눈짓을 날릴 줄 아는 30대 할아버지를 무리없이 설득할 수 있었던 힘. 그건 차태현의 힘이고 영화가 부리는 마술이다.

2012. 1. 25.

by 파니 | 2012/01/25 08:44 | 후감 | 트랙백 | 덧글(0)

<돼지의 왕>


만화란 기본적으로 독백의 매체이다. 만화에서 인물, 사건, 배경은 모두 만화가가 내면적으로 구상해낸 선과 색을 빌어서만 제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 작가의 상상을 스크린에 상영하기 까지 어떤 배우나 세트장도 필요치 않다는 만화의 특성은 첫째로 물적 자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한계가 없지만 둘째로 타자와 접하지 않는 폐쇄적인 주관이라는 점에서 한계가 또렷하다. 실제로 주인공이 화자로 분해서 내면을 가감없이 전하는 만화들은 많이 있다.
정종석의 "괴물"화가 유난히도 오싹했던 까닭은 상기한 만화매체의 특성과 무관하지 않다. 그는 <돼지의 왕>의 주인공이자 화자이며, 작품 전체의 시점과 서사를 관장하던 인물이다. 마치 유령으로 가득한 어드벤쳐 월드를 운행하는 전자보트처럼, 정종석의 위치는 나에게 영화관람의 가장 안전한 포지션을 제공하고 있었다. 아무리 기괴한 정글 속일지라도, 안전벨트만 잘 부여잡으면 레일은 출구로 향해갈 것이고 그곳엔 다시 휘황한 놀이공원이 있게 마련이다. 실제로 정종석은 세 명의 주요인물 가운데 정당함과 부당함, 선과 악, 목적과 수단 사이에서 가장 이해가능한 형태로 갈등하는 인물이다. (정종석의 갈등을 우리는 꿈에서, 교실에서, 독백을 통해서 전해 듣는다)

물론 다른 인물보다 정종석에게 이입하기 쉬운 것은 비단 그가 화자이거나 평이한 성품을 지녀서만은 아니다. 극중에서 그가 처해있는 고통은 모든 대한민국 국민들이 피상적으로나마 공감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다. 직접 얻어맞고 희롱당하는 피해자가 아니라 책상에 앉은 채로 그를 관람하는 묵인자의 고통, 혹은 가라오케에 들락거리는 부도덕한 부모의 아들이 아니라 화목하지만 단지 방 한칸에 살 뿐인 가난한 부모의 아들. 그러나 이해 가능한 고통은 곧 사소화되는 고통이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친구의 말처럼 많은 어른들은 정종석이 겪는 종류의 고통을 "애들끼리는 치고 박고 크는 거지 무슨" 혹은 "나도 어릴 땐 가난했지만 악착같이 성공했잖아"와 같은 성장소설의 소재로 치환해버린다. 정말로 고통을 고통으로 겪어낸 사람, 폭력이 야기하는 지옥을 허물없이 바라본 사람, 여타의 지배와 착취구조를 통해서만 생존이 가능함을 정직하게 인정한 사람들은 모두 죽었기 때문이다. 맞아서 죽었거나 스스로 죽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죽고 나서 고통은 결국 생존자의 자서전 속에서만 서술된다. 그렇게 고통 그 자체의 끔찍함은 변색되고 성공을 증명하는 자료로 치환된다.
그러나 종석의 경우에 고통은 평범한 사회인으로 닳아지기 위한 사포로 작용하지 못했고, 오히려 돼지의 왕을 제 손으로 살해하는 괴물을 탄생시키는 시금석이 되었다. 오직 두 사람을 위한 희생제의. 철이의 목숨을 담보로 살아야 했기 때문에, 결국 둘은 잘 나가는 셰퍼드도, 셰퍼드를 물어죽이는 괴물도 되지 못한 채 이후 10년을 숨죽인 돼지로 살아간다. 가장 평범한 샐러리맨이자 사업가로, 글을 고쳐오라는 출판사의 거드름에 끽소리 않는 대필작가로. 어린 날의 광기와 죄악을 영원히 떨치지 못하는 것은 결국 교묘히 상황을 조작했던 가해자들이 아니라 어떻게든 그 고리를 탈출하려 발버둥쳤던 피해자들이었다. 이것이 진정으로 비극적인 일이며 그렇기 때문에 영화를 보면서 "지옥을 경험했다"고 한 친구의 표현은 적확했다.

여기에 하나 더. 스크린에서 철이가 "중학교 시절을 좋은 추억으로 기억하지 못하게 해 줄 거야."라고 되뇔 때, 객석에서 "브라보"하는 외침이 들렸다. 그 후로 철이가 잘 나가는 무리들을 때리고 차고 비틀 때마다 "브라보" "브라보"하는 외침은 점차 살기등등해졌다. 영화가 끝나고 나가는 길에 살피니 소리가 났던 자리엔 어떤 아저씨 한 분이 맥주캔 여러 개를 발치에 놓아두곤 잠들어 계셨다. 이러한 풍경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과 조응하면서 섬뜩한 인상으로 남았다. 피묻은 시체와 울부짖는 종석에게서 멀어진 화면이 급작스럽게 휘황한 도시의 야경을 비추면서 "내가 있는 곳은 차가운 아스팔트와 육신들이 뒹구는, 세상이다."라는 대사가 흘러나올 때, 너무나 우화적인 만화영화가 너무나 진짜같은 현실로 밀어닥칠 때, 한국에서 정규교육을 받은 사람은 누구나 저러한 돼지의 혐의를 벗을 수가 없다. 가해자이든, 피해자이든, 묵인자이든, 아마도 평생 떨칠 수 없을 가장 원초적이고 솔직한 살육의 메커니즘을 우리는 모두 성실하게 수료해왔던 것이다. 무슨 말이든 생존자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변명일 뿐이다. 갑자기 영화관은 지린내 비릿한 교실이 된 듯 했고, 나는 웃음소리를 낼 수도 그렇다고 눈물을 흘릴 수도 없었다.


2012. 1. 18.

by 파니 | 2012/01/19 13:23 | 후감 | 트랙백 | 덧글(0)

<만추>


애나라는 인물은 쉽게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녀는 개별적 인격이기도 했지만 보편적 영혼과도 닮아있다. 그녀는 <만추>를 보기 위해 극장을 가득 메운 관객들, 아직도 애타는 마음으로 영화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려는 모든 이들의 영혼의 대변자 같았다. 먼지가 구덕구덕 붙은 채로 다시금 지옥으로 되돌아가는 첫 장면을 본 순간부터 나에게 애나는 영원히 가련하고 사랑스러운 여자인 걸로 판명이 났다. 그러한 매혹은 거부할 수도 없고, 거부할 필요도 없다.
놀이공원에서 펼쳐진 복화술, 장례식장에서 벌어진 코미디, 결국 마지막 장면인 정류장에서의 혼잣말로 이어지는 일련의 "장난"들은 마치 "영화"에 대한 김태용의 헌사와도 같은 느낌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거짓말을 통해서 더 많은 것을 전한다. 그들은 약속의 말이 지켜지지 않음을 알고, 사랑의 맹세가 바래어짐을 알고, 늦은 밤의 기도들에 철저히 배반당했던 사람들이다. 언어와 현실의 괴리를 아는 사람들. 애나는 그러한 괴리를 접붙이려는 억척스러움 대신에 언어로 부려보는 속절없는 장난질을 택했다.

"왜 장난을 치면 안되죠? 나는 그녀를 웃게 하잖아요."(훈)
고독한 유부녀들에게 로맨스의 환상을 판매하던 훈이 애나와의 무용한 시간을 연장하기 위해 능청스런 농담을 건넬 때, 내내 묵묵해지던 애나가 서양 여인의 몸을 빌려 제 몫의 슬픔을 비치기 시작할 때, 관객들은 이 모든 것이 거짓임을 알면서도 웃기 시작하고 울기 시작한다. 판타지를 경유해서야 그 형체를 갖추기 시작하는 인간의 마음들. 이렇게 영화는 온갖 유령들이 깃들 수 있는 깊은 사발이 된다.

2012. 1. 18.

by 파니 | 2012/01/19 12:51 | 후감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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