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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성은 입니다

나의 성은 X입니다

 

“응애”하고 세상에 첫 인사를 건넸을 때만해도 나는 아직 아기였을 것이다. 하지만 의사가 내 가랑이 사이를 슬쩍 살핀 후, “축하합니다. 예쁜 공주님이네요.”라고 말하자마자 나는 ‘여자’아기가 되었다. 그 뒤로 내 삶은 ‘여자’라는 따옴표 사이를 벗어나지 않았다.

 

내가 x였다면 좀 더 위험천만하게 살 수 있었을 것이다. 내가 x였다면 좀 더 천진하게 살 수 있었을 것이다. 사실은 우리 모두는 거대한 실험실에서 길러지고 있는 것만 같다. 한쪽 방은 파란 아기 옷을 입히고 레고를 쥐어주는 방, 한쪽 방은 분홍 아기옷을 입히고 바비인형을 쥐어주는 방. 그 기준은 페니스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다르고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하면 어떻게든 기준에 맞춰서 어디론가는 꾸역꾸역 끼워넣어야 하는 그런 방.

왜 나는 ‘여성’이 아닌 나의 모습을 상상조차 하지 못할까? ‘여성’에게 강요되는 수많은 명령들에 자주 숨막힐 것 같으면서도 다시 또 다시 ‘여성’으로 보이려 애쓰기만 할까? 아름다운 것은 나의 다양한 가능성들이 쏟아져나오는 관계, 나도 몰랐던 내 안의 잠재적이지만 강력한 힘이 목까지 차오를 때 그걸 꿀꺽 집어삼켜 답답한 숨통이 되는 것이 아니라, 목까지 차오르는 나의 내면이 걸리는 것없이 와르르 쏟아져 나와 무지개색으로 차르륵 쏟아질 때 그게 아름다운 것이지.

 

너무 오래 가면을 쓰고 있어서 이제는 얼굴거죽에 들러붙어버렸나 보다. 어떤 것이 맨얼굴인지, 맨얼굴이란 게 원래 있기나 한 건지도 잘 모를 정도로 너무나 익숙하게 여성성-남성성은 나의 살가죽에 찰싹 들러붙어 있다. 목소리와 표정, 말과 행동, 꿈과 절망까지도 가면에 맞추어 상영된다. 모두가 가면을 쓰고 있으면 가면놀이는 결코 끝나지 않는다. 오래 쓰고 있던 탓에 이제는 가면을 벗는 게 무섭고 가면놀이에서 왕따가 되는 게 무섭기도 하지만, 맨 살갗으로 맞는 바람은 훨씬 더 차갑고 훨씬 더 생명력 있다.

x가 되어서 밥을 먹어보자. x가 되어서 운동을 해보고 x가 되어서 춤을 춰보자. 고무줄놀이를 하다가 그대로 축구를 하러도 가보고, 밥을 많이 먹고 싶은 날은 와구와구 적게 먹고 싶은 날은 딸그락딸그락 먹어보자. 쉬폰 치마에 커다란 운동화도 신어보고, 미소를 짓다가 신나면 발을 쿵당당 구르며 뛰어보자.

x가 되어서 또 다른 x에게 인사하고, x와 산책을 하자. x가 되어서 또 다른 x를 사랑해보자. x와 x의 사랑은 미리 정해진 포옹의 방식도 없고, 언제나 한 쪽은 이끌고 한 쪽은 이끌려야 한다는 강박도 없다.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는가보다는 오로지 서로에게 집중하는 관계, 그 속에서 나도 몰랐던 내 안의 잠재된 힘을 이끌어내주는 관계, 나를 제약하기 보다는 나에게 새로운 영감을 주는 관계! x와 또 다른 x가 만날 때 우리의 관계는 들꽃보다 더 풍요로워질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나의 헛소리인가? 아니면 시궁창에서 절박하게 피어난 진심인가?

by 파니 | 2009/08/08 00:05 | 트랙백 | 덧글(1)

그래 내가 망할년이다

동생은 욕을 잠꼬대처럼 씨부렁거리며 잠엘 들지 않고 있다. 옆에는 새벽기차를 타려다 놓친 엄마와 또다른 동생이 시체처럼 잠들어 있다. 그들은 아무 말도 씨부렁대지 않는다.
드디어 가족은 파탄났다. 항상 파탄나는 과정에 있었지만 오늘은 술과 담배가 등장하고, 담뱃재가 바닥에 던져지고, 마침내 서로를 포기했다는 말같은 것들이 난무했다. 이 상황에서도 나는 여성제 기조글을 써보겠다고 자판을 두드리고 있다. 동생과 엄마와 또다른 동생은 나에게 중요한 세 사람이다. 그래서 이 상황을 견디질 못하겠다. 행복하지 못한채로 행복해지자고 쓰는 글따윈 다 거짓말이다. 나는 행복이란 게 어떤건지 상상조차 못하겠다.

by 파니 | 2009/08/08 00:03 | 오늘의 말 | 트랙백 | 덧글(1)

아직 나한테는 여행의 계획이 남아있다.

오래전부터 막연하게 오랫동안 함께할거라고 생각하는 친구가 있다. 그 친구랑 오늘 여행얘기를 하는데, 생각나는대로 떠벌렸지만 지금까지도 후회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 여행은 그간 우리가 말하고 말하고 말했던 그 모든 엉거주춤한 미래가 드디에 제 갈길을 찾아 움직이는 요이땅일 것이다. 입이 근질근질해서 말하지 않고는 못 배겼던 내 마음의 지도가 이제는 허공이 아니라 땅의 발걸음으로 그려질 것 같다. 한 걸음 한 걸음 몸무게를 모두 길어서 묵직한 여행길이.
 
이제 여행의 약속이 전혀 터무니없지 않다. 지켜지지 못할까봐 무섭지도 않다. 그만큼 오랫동안 말해왔고, 이것 저것 재봤고, 그래서 의심했다가 다시 확신하기를 수백번 반복했다. 세월이 흐를수록 그 친구와 한 약속이 절박해지더라. 우리가 말한 것을 하지 않고는 내가 괴로워서 잘 못 살게 된 것이다. 이렇게 글을 적다보니 그간의 우여곡절이 모두 이 여행을 위한 계획이었다는 생각마저든다. 근데 이런 터무니없는 추측마저, 친구가 부담스러워할까봐 숨기기보다는 오히려 그 친구한테 몇번이고 말하고싶은 마음이 드는건 왤까? 내년의 여행에 대해서는 그만큼 확신이 강하다.  

by 파니 | 2009/06/26 02:39 | 트랙백 | 핑백(1) | 덧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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