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01월 25일
<과속 스캔들>
때로는 어떠한 스토리라인보다 배우의 몸이 더 많은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마치 <해리포터> 시리즈를 찍는 10년간 천천히 자라난 다니엘과 엠마의 몸이, 시리즈 마지막에서의 왈츠에 형언키 어려운 시간의 결을 불어넣었던 것 처럼. 영화는 언제나 카메라에 의해 찍힐 대상에 의해서만 자신을 설명할 수 있다. 배우의 몸이나 세트장과 같은 대상들은 영화 이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다. 이들은 시나리오를 가지고 창조한 세계가 아니라 오히려 이들에 의해 시나리오가 생겨난다는 점에서, 우리는 이들을 선존재하는 영화의 타자 혹은 영화라는 존재의 영도(零度)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이러한 전제를 겸손하게 수긍하며 외부 대상의 영향력을 텍스트 내부로 끌어들여 그 힘에 대한 길항을 통해 서사를 조직해갈 때, 그 순간 복제시대의 예술품으로서의 영화는 자신의 윤리와 미학을 얻게 되는 것은 아닐까? 류승범의 몸을 입지 않은 <부당거래>의 검사를 상상하기 어려운 것 처럼, 통영의 구불구불하고 비좁은 도심에서 벌어지지 않는 <하하하>의 여행을 상상하기 어려운 것 처럼.
(이러한 영화의 특성은 TV에 나오는 인물이나 배경을 그대로 진짜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어린애나 할머니의 태도에서도 보이는 건 아닐까. 아직 카메라에 찍힌 대상이 자본이나 테크놀로지를 통해 쉽게 조작될 수 있는 시대임을 자명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 친구의 할머니는 설날특선 <아바타>를 보시다 "저 사람은 외국인이냐? 난 저런 건 본 적이 없다..."라 물으시며 심란한 얼굴이셨다고.)
위와 같은 의미에서 <과속 스캔들>이 내게 줬던 감동의 대부분은 배우 차태현의 몸에서 비롯했다. 고등학교 야간자율학습 시간, 무조건 탈출하고 싶었지만 딱히 갈 곳을 모를 때는 멀티플렉스 영화관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나는 휘황한 포스터들 가운데 벙벙해하다 게 중 친숙한 것들을 골라내곤 했는데 그 때 차태현의 영화를 자주 봤다. <연애소설>, <엽기적인 그녀>, <첫사랑 사수 궐기대회>와 같이 한 줄기로 묶어낼 수 있는 소년 로맨스물에서 그는 소심했지만 제 몫의 인생을 소녀에게 헌납할 줄 알았다. 누구나 수긍할 법한 첫사랑의 감정을 그는 연기했고, 그것도 아주 보편적이고 쉬운 표현방식으로 해냈다. 사람들은 그에게서 신묘한 표현력을 가진 천재를 보진 않았지만 대신 자신의 거울을 보듯 일상인의 표정을 스크린에 비춰보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그렇게 철없던 소년은 관객과 함께 나이를 먹어 이제는 아빠를 연기한다. 예전의 까불락거림과 친밀한 제스쳐는 그대로지만 정직하게 나이 든 몸은 예전과 다른 감흥을 주었다. 그건 열광보다는 무던함으로 그의 영화를 보러가던 나의 고딩시절에 대한 추억일 수도 있고, 혹은 초등학교 첫사랑과 결혼을 맞이했다던 영화같은 그의 일상에도 불구하고 장삼이사의 일상사 같은 그의 영화 목록이 벌이는 기이한 공명일 수도 있고, 혹은 소년도 늙는다는 진리? 혹은 소년처럼 늙을 수 있다는 감동일 수도 있다. 마지막 장면, 기타를 매고 딸과 손주를 흐뭇하게 바라보다 문득 관객석에 앉은 사랑하는 여인에게 능글맞은 눈짓을 날릴 줄 아는 30대 할아버지를 무리없이 설득할 수 있었던 힘. 그건 차태현의 힘이고 영화가 부리는 마술이다.
2012. 1. 25.
# by | 2012/01/25 08:44 | 후감 | 트랙백 | 덧글(0)



